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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늦잠실컷 자고 아이크림처럼 소중한 주말 중 하루를 허망하게 날려버리느냐 마느냐의 경계에 선


시점에서 간신히 채비를 하고 학교에 나갔다. 오늘은 비록 재밌게 못놀지만 내일 재미있게 놀려면 

오늘 그래도 왠만큼 숙제며 공부들을 해 놓아야 하겠다는 의무감에서이다. 

리포트를 쓰겠다고 노트북을 펼쳤지만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다. 새로 산 의자는 날 열람실 까지는

잘도 끌어냈지만, 나에게서 그 이상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백사장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나가기 귀찮았다. 그래도 이때 아니면 언제 보겠냐 싶어 녀석을 

만나 저녁대신 맥주 한 잔, 두 잔. 기분좋게 마시고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다. 

한 잔 찌끄리고 나니 이제 좀 진도가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타임 아웃. 열람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버렸다. 그래 집에가서 좀 더 하자~!

그렇게 열람실을 나섰다. 


집에 오는 길. 보통은 노래 한 곡 반을 들으면 집 도착이다.

오늘은 뭔생각이 들었는지, 신호대기하면서 극장 시간표 검색. 11시 45분 심야상영이 하나 

남아있었다. 은교.




집 가까운 곳에 그리 붐비지 않는 극장이 있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며 입장. 몇 편의 

시덥잖은 광고가 흘러간 뒤 영화 시작.

먼저 영화를 보고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감정적으로 피곤하고, 말초적으로는 

자극적인 스토리를 예상했었다. (일부 장면이 야하긴 했었지만....)

땡.

영화는 즐거웠다. 보는 즐거움도 있었고, 상상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나보다 두 배 이상은 나이가 

많은 노인의 감정선 이었지만, 그 안에 연기를 하는 배우가 젊은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본 

덕분인지, 적요 에게도 무리없이 감정이입이 되고 몰입할 수 있었다. 암튼 즐거웠다. 적어도 영화 

중반부 까지는...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불편해졌다. 살면서 느끼기 싫은 감정들, 받아들이기 싫은 상황

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현실 속에서의 나이건, 영화 속의 적요이건 이건 

답이 없었다. 

보통은 현실이든 책이든 영화이든 갈등이 생기면 해결책을 요리조리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보면서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시간이란 그런 것. 그렇게 무서운 거다.

제자의 시상식에 참석해서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시인으로서, 수상자의 스승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적요 말하길.

"나는 늙었습니다. 젊은이들, 그들에게 젊음이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노인에게 늙음 역시 

잘못해서 받는 벌이 아닙니다."

아마 소설 속 은교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말했던 것 같다.

이 한 구절을 통해, 적요는 세상에게 울부짖고, 제자를 꾸짖고, 은교에게 호소하고 싶었으리라.

여태까지, 누군가 말을 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말을, 소설이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에 

(아닌 경우도 많지만) 멋있어 보이려고 폼잡는다는 생각이 들고,  은유적으로 전달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게 되고, 화자가 비겁하다는 생각을 몰래 해왔다. 그러니까 말하면서 

남의 말을 따와서 자신의 생각 감정을 표현하려 하는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영화 속 적요는 이런 나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것이고, 들키고 싶지 않지만 알아줬으면 하는 속마음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라는 걸.

감독의 힘인지 원작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는 구석구석 생각할 거리들, 음미할 거리들을 

곳곳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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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영화 안팍으로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었다. (교훈도 있고...)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큰 것은,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는 것.

적요의 말마따나 늙은 것이 벌은 아니지만, 벌일 수 있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내가 나이들었다는 이유로 할 수 없고 가질 수 없게 된다면, 그 때 느끼는 좌절감은 정말 너무 깊고

아플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조금씩은 느끼고 있다.)


그러니 지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에 부지런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사랑해야지.


간만에 좋은 영화였다. 영화 보는 내내 적요의 시선, 적요의 감정을 따라다니고, 그 느낌들을 

까먹고 싶지 않아서, 메모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고, 그래서 한달음에 집에와서 컴퓨터를 켜게 만든

그런 영화였다. 


덧. 앞으로 케잌에 초는 한 개 씩만 꽂아야지. 올해 한 살 더 먹는 거니까.

덧2. 적요처럼 글씨 이쁘게 잘 쓰는건 고시생에게 독이렸다. 아마 그렇게 잘 쓰면 채점자 마저

너무 몰입해서 꼼꼼하게 읽은 나머지 점수가 잘 안나오겠지. 그만큼 영화 속 글씨체는 정말 멋졌다.